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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적이/2003

시학여행 2

지방에서 지역축제를 하면 모두 그저그런 내용에 이름만 번지르르 붙여 관광객 모으는 것으로 여겼었다. 효석축제나 효석문학관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효석축제야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효석문학관은 그게 아니었다. 뭔가 비달 사순이었다.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자료 수집도 엄청났다. 승씨 근처에서 함께 구경하면서 나는 근대문학 시인작가들의 이름들을 주워섬겼다. 효석문학관에 메밀학회의 학회지나 메밀반죽법, 메밀로 만든 음식들까지 있는 건 상당한 '오버'이지만 장석남 같은 시인들의 작품까지 걸어 놓고 당당한 중요 문학관으로 있는 것 같았다.

가는 길에는 당나귀도 있었다. 눈이 까맣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당나귀였다. 당나귀도 아닌데 나는 지용의 시 「말」이 생각났다.

말아, 다락 같은 말아,
너는 즘잔도 하다 마는
너는 웨그리 슬퍼 뵈니?
말아, 사람편인 말아,
검정 콩 푸렁 콩을 주마.

이말은 누가 난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데 달을 보며 잔다.


- 정지용「말1」全文

민박집에 돌아와서, 저녁은 오징어였고 술안주는 떡볶이, 술은 매실주였다.

함께 사온 시집을 뽑고 돌려가며 글들을 적고 나니, 앞에 있는 술잔이 보였다. 술을 마시고 나니 술병이 보였고, 술병을 비우고 나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이었다. 나는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내 소리는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걷다 쉬다 걷다 쉬다 결국엔 택시를 잡아타고 터미널로 향했다. 버스는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모두들 피곤했는지 오래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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