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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적이/2003

날아간 공각기동대와 우리말 쓰기

늦잠을 잤다. 공각기동대가 날아갔다.
씨네큐브에서 11시 시작인데 일어나보니 10시였다.


인터넷을 켜고 오래 안 들어갔던 클럽을 들어가본다.
최종규라는 분이 운영하는 곳인데,
헌책방 이야기와 우리말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가끔 들어갈 때마다 새말을 많이 익히게 되는데
오늘은 '아홉꼬리여우'라는 낱말을 새로 배웠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말인데도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구미호'를 쓴다.

구미호의 '호'를 나는 한자로 쓸 줄 모르는데
그게 '구미호九尾狐'를 써서는 안 되는 이유라고 할 수는 절대 없지만
어쩐지 우스운 생각이 조금은 드는 것이다.

앞으로 나도 한자말을 우리말로 고쳐쓰려는 노력을 하려고 한다.
무엇이나 극단적인 것은 안 좋지만 말은 더더욱 그러하여
> 첫째, 어감이 현저히 다르지 않고
> 둘째, 경제성이 현저히 떨어지지 않아서
> 언중들이 동의하기 쉬운 것이어야 한다
는 원칙 정도는 물론 있어야 한다.

최종규 씨가 우리말 낱말을 보인 것이나 만든 것 중에서도
'비장애인非障碍人/非障人'을 '안 장애인'이라고 바꾼다든가
'학기말시험學期末試驗'을 '학기끝시험'으로
'영가靈歌'를 '영노래'로
'독차지獨―'를 '혼자차지'로 옮기는 부분은 쉽게 동의하기 힘들다.

그러나 쉽게 바꿀 수 있는 말들도 적지 않다.
'수화手話'를 '손말'이라고 부른다거나
'휴차休車'를 '쉬는 차'라고 쓴다거나
'상호商號'를 '가게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쓸 수 있는 말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쉽게 바꿀 수 있는 말이라도 어감의 차이가 너무 크면 문제가 있다.
가령 '총성銃聲'을 '총소리'로 바꾸는 것은 쉽게 동의할 수 있지만
두 말의 어감은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다. 가령,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 기형도「대학 시절」, 『기형도 전집』, 문학과지성사, 1999, 43쪽./『입 속의 검은 잎』재판, 문학과지성사, 1994, 22쪽.

에서의 '총성'을 '총소리'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의 우리말 쓰기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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