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적이/2003
불만들
엔디
2003. 6. 5. 22:54
어제 시학 세미나가 끝나고 뒷풀이를 2차까지 갔다가 집에 늦게 돌아왔다. 2차엔 林, 왕수, 재철 등이 동행했다. 재철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의 생각이 얼마간 이상론理想論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쁜 의미에서가 아니라 좋은 의미다. 나는 나의 그런 생각이 좋다. 그 理想論도 유토피아적인 理想論이라기보다 단지 몇몇 현실정치의 관행이 걸림될이 되는 것일 뿐이다. 가령, 민주주의는 理想이지만 폴리아키는 理想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폴리아키를 이루는 것도 무척 어렵다. 내 생각의 실현이 어려운 것은 단지 그런 어려움이다.
내 생각의 실현의 어려움들이 그렇게 크지 않은 이유는, 내 기대가 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노무현도 유시민도 그렇지만, 나도 내 생각에는 중도우파 정도에 속할 것 같다. 아니, 그들보다는 좀더 좌에 있겠지. 어쨌든 내 생각의 좌표가 그렇다보니 나의 기대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NEIS가 해킹되었다고 한다. 교육부 측은 기술적 보안이 아니라 "'인적 보안'이 허술해" 발생한 일이라지만, 사실 기술적 보안이 허술한 것보다 인적 보안이 허술한 게 더 무서운 일 아닌가? 내 어머니도 교육공무원이시지만, 나는 아직도 공무원의 철저하고 엄밀한 업무에 대해 신뢰할 수 없다.
참 이상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NEIS문제는 서명운동으로 해결될 수 있는 여지가 큰 문제인데 왜 서명운동이 눈에 띄지 않을까. NEIS문제는 '나'의 신상정보가 기록되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나는 내 신상정보가 NEIS상에 뜨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내 신상정보를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지 않은가? 대한민국 헌법 제17조는 분명히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새만금간척사업 3보1배. 학내 3보1배 참가단이 백양로에서 출발했을 시각, 나는 우체국을 나서고 있었다. 시간이 맞았다면 참가할 수 있었을텐데……. 다 알다시피, 불교와 원불교 그리고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성직자들이 다같이 모여 3보1배의 고행을 마쳤다.
아무래도 내게 크게 보이는 것은 이희운 목사의 그 십자가였다. 새만금이 생명의 터전이라면 십자가는 죽음의 형틀이다. 그 섬뜩한 대비가 내게서 눈물을 조금 빼기도 했다.
학내 연신원 문제나, 새만금간척사업 문제의 핵심은 '소유'라는 개념에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내것'이라는 생각이 가장 큰 문제다. 가령, 내게 휴대전화가 있다고 하면 그 휴대전화는 분명히 내 것이다. 그렇지만 법적으로 내 소유인 버스회사가 있다고 하면 그것이 나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새만금은 많은 철새들의 중간기척지점이고 연신원은 얼마간 시와 풀의 고향이다. 그것이 대체 누구의 소유란 말인가? 생의 의미조차 모르고 돈을 벌려는 사람들과 시 한편으로도 배부를 줄 모르는 대학의 소유란 말인가?
내 생각의 실현의 어려움들이 그렇게 크지 않은 이유는, 내 기대가 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노무현도 유시민도 그렇지만, 나도 내 생각에는 중도우파 정도에 속할 것 같다. 아니, 그들보다는 좀더 좌에 있겠지. 어쨌든 내 생각의 좌표가 그렇다보니 나의 기대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NEIS가 해킹되었다고 한다. 교육부 측은 기술적 보안이 아니라 "'인적 보안'이 허술해" 발생한 일이라지만, 사실 기술적 보안이 허술한 것보다 인적 보안이 허술한 게 더 무서운 일 아닌가? 내 어머니도 교육공무원이시지만, 나는 아직도 공무원의 철저하고 엄밀한 업무에 대해 신뢰할 수 없다.
참 이상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NEIS문제는 서명운동으로 해결될 수 있는 여지가 큰 문제인데 왜 서명운동이 눈에 띄지 않을까. NEIS문제는 '나'의 신상정보가 기록되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나는 내 신상정보가 NEIS상에 뜨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내 신상정보를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지 않은가? 대한민국 헌법 제17조는 분명히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새만금간척사업 3보1배. 학내 3보1배 참가단이 백양로에서 출발했을 시각, 나는 우체국을 나서고 있었다. 시간이 맞았다면 참가할 수 있었을텐데……. 다 알다시피, 불교와 원불교 그리고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성직자들이 다같이 모여 3보1배의 고행을 마쳤다.
아무래도 내게 크게 보이는 것은 이희운 목사의 그 십자가였다. 새만금이 생명의 터전이라면 십자가는 죽음의 형틀이다. 그 섬뜩한 대비가 내게서 눈물을 조금 빼기도 했다.
학내 연신원 문제나, 새만금간척사업 문제의 핵심은 '소유'라는 개념에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내것'이라는 생각이 가장 큰 문제다. 가령, 내게 휴대전화가 있다고 하면 그 휴대전화는 분명히 내 것이다. 그렇지만 법적으로 내 소유인 버스회사가 있다고 하면 그것이 나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새만금은 많은 철새들의 중간기척지점이고 연신원은 얼마간 시와 풀의 고향이다. 그것이 대체 누구의 소유란 말인가? 생의 의미조차 모르고 돈을 벌려는 사람들과 시 한편으로도 배부를 줄 모르는 대학의 소유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