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적이/2003

어느 날의 시읽기

엔디 2003. 5. 31. 23:47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그만 자려다 시 하나 읽고 자야지 하고 서가에 다가갔다.
마침 다음 주 시학 꺼리인 김혜순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뒤로 뒤적이며 읽기 시작했다…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

아니다, 아니다,

?누가 네게 가르쳐주었니
?이렇게 재빠르게 남의 몸에 낙인 찍는 법을
?벙어리처럼 손가락으로 말하는 법을
?네 손가락 하나하나가 바늘이 되는 법을
?왜 네가 새긴 무늬들은 내 심장 박동마저 방해하니
?도대체 누…

또 아니다,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6·25와 5·18 사이에 있을 뿐
그 사이에서 음악은 돌고 돌면서 미쳐갈 뿐
폭동이 일어난 교도소, 내 머릿속
전깃…

아아, 이것도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

지하철 타고 강의하러 가는데 누군가 날 쳐다봤다
내 등을 깊숙이 찌르는 눈, 고드름같이 뜨거웠다
낮이나 밤이나 살 속 깊숙이
얼음의 칼날을 꽂은 채 살아가는 나지만
그 순간 부르르 떨었다
내 발 밑에서 얼음장들이 소리없이 깨어지고
나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곤 갑자기 지하철 문 밖으로 튕겨나가 의식을 잃었다
점점 아래로 떨어지는 시간 속의 고요
얼마나 지났을까
다음 번 열차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는 것 같았다
늙은 아저씨가 내 머리맡에다 혀를 끌끌 차고 지나갔다
는 엉금엉금 기어 플라스틱 벤치로 가 다시 쓰러졌다
또다시 얼마나 지났을까
내 몸을 냉동실에서 꽁꽁 얼린 다음
끓는 냄비 속에 거꾸로 처박는 것처럼, 그렇게
누군가 나를 잡아 흔들었다
집이 어디예요? 집 전화번호를 말하세요.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지르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러나 꿈속처럼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이고, 공기가 이렇게 무겁다니
그러면서도 나는 내 속에 박힌 얼음을 꼭 끌어안았다
얼어붙은 연못 속에 갇혀 있는 아이 얼굴
내 어릴 적 얼굴을 도려낸 것처럼, 그렇게
나는 얼음 얼굴을 꼭 끌어안았다
집이 어디예요? 아이고 아주 의식을 놓았네
누군가, 아줌마 목소리가 내 어깨 위에 올려졌다
그러나 내 몸 속에서 겨울 창문에 피는 성에꽃다발 가득 메단
성에나무가 확 피어오르고
그 성에나무 사이로 얼음으로 밀봉된 마을이 나타나고
그 마을 속엔 오래고 오랜 나의 외갓집이 청결하게 서 있었다
그 집이 내 가슴을 환하게 밝히며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몸 밖으로 말을 했다
지금 시간에 우리집엔 아무도 없어요 제가 일어날 거예요
그리고 나는 다시 봉해졌다
미래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과거만으로 봉인된 얼음 속으로
지하철이 계속 오고 갔지만 나는 빙산처럼 가만히 떠 있었다
아이를 꼭 껴안으면 껴안을수록 내가 녹는 것처럼, 그렇게
냉동실의 얼음이 아무도 모르게 가만히 증발하듯, 그렇게
사라지고 싶기도 했다

-「성에꽃다발」全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