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
파괴된 언어
엔디
2003. 5. 16. 23:55
KBS 2TV "개그콘서트" 중 "新 봉숭아학당" 코너에는 '세바스찬'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자신을 "루이 세바스찬 윌리엄스 주니어 2세"라고 소개하며 "순수한 혈통"이라는 주석을 붙인다. 그런데 이름을 찬찬히 살펴보면 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루이', 즉 Louis는 프랑스 말 이름이다. 영어로는 '루이스'다. 세바스찬은 대체로 영어이름으로도 볼 수 있으나 독일어 이름으로도 쓰인다. Johann Sebastian Bach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물론 가운데 이름은 대체로 세례명일 경우가 많다. 세바스찬은 3세기경 로마 기독교 순교자이다.) 윌리엄스는 명백히 영어 이름이다. 불어로는 기욤므, 독일어로는 빌헬름이다. 따라서 이름으로 본다면 그는 결코 "순수한 혈통"이 될 수 없다. 최소한 프랑스 인과 영국인이 될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심각해지는데, 프랑스는 유난히 혼혈이 많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민족 개념이 불분명하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우익의 득세가 힘들다.)
그야 어떻든, 개그 캐릭터의 혈통 문제는 그렇다치고 언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언어의 순수함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흔히들 언어가 불순하다, 언어가 타락했다는 이야기를 곧잘 하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은 컴퓨터 통신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번지는 "-해여"체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짙다. 이런 현상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언어 감각이 특히 보통 사람보다 뒤지거나 혹은 학교교육과 가정교육이 특히 부족한 청소년의 글을 가져다놓고 심각하다, 고쳐야 한다고 탁상공론을 일삼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대의 언어학은 '언어의 타락'이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언어는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할 뿐이다.
언어가 만약 '타락'해가는 것이라면 지금 우리가 쓰는 말, 그러니까 앞서 말한 '우려하는 사람들'이 지키고자 하는 바로 그 말들이 이미 '타락'한 말들이다. 그건 '훈민정음 해제'에서부터 드러난다. 왼쪽 그림을 보자. 먼저 "나랏 말쌈"의 "쌈"이다. "ㅏ"로 새겼지만 실제로는 "ㆍ(아래아)"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아래아의 음가가 따로 있었다. 제주도의 나이드신 분들 중 일부는 아직 아래아 음가를 발음하시는 분들이 있다고 한다. 그다음 "中國듕귁"이다. 앞쪽의 "世宗御製셍종엉젱"와 함께 보면 좋겠다. 현대와는 음가도 다르거니와 종성(받침) 음가가 없는 한자에 모두 "ㅇ"이 들어있다. ("종"의 받침은 "ㅇ"이 아니라 "ㆁ"이다.) 이건 "동국정운"에 의거한 한자의 음가 표기로서 보다 정확한 한자음을 표기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발음도 구별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림을 자세히 보면 글자 왼쪽에 "ㆍ"이나 ":"같은 것을 달아놓은 게 보일 것이다. 이건 당시의 성조를 표기한 것이다. 우리 말도 중국처럼 성조가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 표준어에서 성조, 없다. 경상도 사투리에는 아직 성조가 어느 정도 남아있다. 제주도 노인들이나 경상도 사람들이 그렇다면 가장 덜 타락한 말을 하는 것인가?
최근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우리 말에서 'ㅔ'와 'ㅐ'의 구별도 점차 희미해져가고 있다. '연세대학교'를 사람들은 '연새대학교'나 '연세데학교'로 발음한다.
그러니 "국어파괴"를 염려하는 사람을 붙들고 우리는 "ㅐ"와 "ㅔ"를 구별해 발음해볼 것을 요구해볼 일이다. 혹여 이걸 통과하면 "ㆍ(아래아)"의 발음을 요구해볼 일이다. 이건 우리가 모르니까 그쪽에서 아무렇게나 발음하고 통과했다고 우기면 마지막으로 우리말을 "사성四聲"에 맞게 발음해보라고 요구해볼 일이다. 이건 훈민정음에 정확히 적혀 있으므로 평平, 상上, 거去, 입入의 규칙만 알면 테스트하기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해여"체도 마찬가지다. 우리말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정도로만 생각하면 된다. 그것은 기존의 우리말에 익숙해져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불쾌하게 여기더라도 언중의 암묵적 동의가 있으면 변해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우리가 언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를 위해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당대 사람들이 많이 쓰는 대로 변한다. "무식한" 사람들이 많아서 낱말의 뜻을 제대로 몰라 잘못 쓰이는 낱말들도 대다수의 언중들이 그렇게 쓰면 바뀌게 된다. 학자들이 언어를 잘못 분석해서 과거와 다른 뜻이 부여된 경우도 있다. (양주동 선생 등이 '얼이 빠지다'에서 '얼'을 '넋'으로 보아 널리 퍼졌으나 '어리석어'의 준말로 보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다행스럽게도 우리말은 그리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더욱 매체와 관계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읽는 신문이나 TV, 서적들은 여전히 '올바른' 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학생들에게도 역시―보기는 싫어하겠지만―교과서가 있다. 이런 매체들은 표준어 규정이 바뀌기 전까지는 그 표기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매체가 발달하면 할수록 우리말은 바뀌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컴퓨터통신이나 인터넷 사용율이 높은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이런 형식의 글을 접하는 비율이 적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해여'체의 문장과 맞춤법에 맞는 '-합쇼'체 '-해요'체의 문장을 잘 구별한다. 중고교 과제나 대학교 에세이나 퀴즈에 '-해여'체를 쓰는 사람은 아마 없거나 있더라도 극소수일 것이다.
오히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상업광고와 간판들이다. 이들은 언어를 언어 자체로 보기보다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업적인 광고와 간판들은 실제로 널리 쓰이지 않는 언어까지도 이슈가 될만한 것은 무조건 흡수하여 써먹는다. 연세대학교 학생회관에도 '맛나샘', '부를샘', '고를샘' 등의 고운 이름 속에는 "世's토랑", "비벼바", "철판보끄미" 따위의 상업적인 간판이 걸려있다. 이런 광고들은 실제의 언어를 필연적으로 일정부분 왜곡하게 된다. 실제로는 이렇게 간판까지 걸릴 정도로 이런 말글이 쓰이지 않는다. 이런 부분은 우리가 되도록 고쳐나가려고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이 경우 고치려는 노력은 결국 개인차원의 것일 수밖에 없고, 맞춤법을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실은 사회 차원에서 고쳐나갈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한글화이다. 한글화는 언어의 '타락'을 막으려는 불가능하고도 무용無用한 시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흔히 '한글세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대와 잘 맞는다는 점에서 다른 변화와 맞물려 돌아갈 수 있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중요한 개념어에서부터 우리의 일상 언어까지 한글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은 조금씩 바꾸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품사'를 '씨'로 바꾸는 것이라든가 '문장'을 '월'로 바꾸는 것은 한글학회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도 하고 한글세대에 맞게 고치는 것이기도 하다. '월'같은 경우는 '文'을 '글월 문'이라고 새기는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남아있다. '피투성被投性의 존재'는 '던져진 존재' 정도로 현재 이미 바뀌어 쓰고 있다. '벤또'나 '와리바시', '요지'등은 점차 '도시락', '(나무)젓가락', '이쑤시개' 등으로 바뀌고 있다.
앞으로도 이런 노력은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 말이 생겨난 근본이 한심스러운 '로비lobby'라는 말을 '안터'라는 말로 고쳐쓰려는 노력은 조금 진행되다가 말았다. '엘리베이터'를 한자어이긴 하지만 '승강기'정도로 바꾸려는 시도도 실패했다. '에스컬레이터'는 '자동계단'정도로 부르면 무난할 듯 싶은데 시도조차 없었던 듯 하다.
물론, '안터'라고 하지 않고 '로비'라는 외래어를 쓴다고 언어가 더 '타락'된 언어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말이 더 아름다워보인다면 그런 장점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언어도 하나의 문화이니만큼 돈 따위에 좌지우지되게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잊고 있지는 않은가, 언어도 하나의 문화라는 것을.
그야 어떻든, 개그 캐릭터의 혈통 문제는 그렇다치고 언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언어의 순수함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흔히들 언어가 불순하다, 언어가 타락했다는 이야기를 곧잘 하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은 컴퓨터 통신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번지는 "-해여"체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짙다. 이런 현상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언어 감각이 특히 보통 사람보다 뒤지거나 혹은 학교교육과 가정교육이 특히 부족한 청소년의 글을 가져다놓고 심각하다, 고쳐야 한다고 탁상공론을 일삼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대의 언어학은 '언어의 타락'이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언어는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할 뿐이다.

최근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우리 말에서 'ㅔ'와 'ㅐ'의 구별도 점차 희미해져가고 있다. '연세대학교'를 사람들은 '연새대학교'나 '연세데학교'로 발음한다.
그러니 "국어파괴"를 염려하는 사람을 붙들고 우리는 "ㅐ"와 "ㅔ"를 구별해 발음해볼 것을 요구해볼 일이다. 혹여 이걸 통과하면 "ㆍ(아래아)"의 발음을 요구해볼 일이다. 이건 우리가 모르니까 그쪽에서 아무렇게나 발음하고 통과했다고 우기면 마지막으로 우리말을 "사성四聲"에 맞게 발음해보라고 요구해볼 일이다. 이건 훈민정음에 정확히 적혀 있으므로 평平, 상上, 거去, 입入의 규칙만 알면 테스트하기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해여"체도 마찬가지다. 우리말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정도로만 생각하면 된다. 그것은 기존의 우리말에 익숙해져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불쾌하게 여기더라도 언중의 암묵적 동의가 있으면 변해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우리가 언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를 위해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당대 사람들이 많이 쓰는 대로 변한다. "무식한" 사람들이 많아서 낱말의 뜻을 제대로 몰라 잘못 쓰이는 낱말들도 대다수의 언중들이 그렇게 쓰면 바뀌게 된다. 학자들이 언어를 잘못 분석해서 과거와 다른 뜻이 부여된 경우도 있다. (양주동 선생 등이 '얼이 빠지다'에서 '얼'을 '넋'으로 보아 널리 퍼졌으나 '어리석어'의 준말로 보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다행스럽게도 우리말은 그리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더욱 매체와 관계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읽는 신문이나 TV, 서적들은 여전히 '올바른' 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학생들에게도 역시―보기는 싫어하겠지만―교과서가 있다. 이런 매체들은 표준어 규정이 바뀌기 전까지는 그 표기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매체가 발달하면 할수록 우리말은 바뀌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컴퓨터통신이나 인터넷 사용율이 높은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이런 형식의 글을 접하는 비율이 적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해여'체의 문장과 맞춤법에 맞는 '-합쇼'체 '-해요'체의 문장을 잘 구별한다. 중고교 과제나 대학교 에세이나 퀴즈에 '-해여'체를 쓰는 사람은 아마 없거나 있더라도 극소수일 것이다.
오히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상업광고와 간판들이다. 이들은 언어를 언어 자체로 보기보다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업적인 광고와 간판들은 실제로 널리 쓰이지 않는 언어까지도 이슈가 될만한 것은 무조건 흡수하여 써먹는다. 연세대학교 학생회관에도 '맛나샘', '부를샘', '고를샘' 등의 고운 이름 속에는 "世's토랑", "비벼바", "철판보끄미" 따위의 상업적인 간판이 걸려있다. 이런 광고들은 실제의 언어를 필연적으로 일정부분 왜곡하게 된다. 실제로는 이렇게 간판까지 걸릴 정도로 이런 말글이 쓰이지 않는다. 이런 부분은 우리가 되도록 고쳐나가려고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이 경우 고치려는 노력은 결국 개인차원의 것일 수밖에 없고, 맞춤법을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실은 사회 차원에서 고쳐나갈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한글화이다. 한글화는 언어의 '타락'을 막으려는 불가능하고도 무용無用한 시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흔히 '한글세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대와 잘 맞는다는 점에서 다른 변화와 맞물려 돌아갈 수 있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중요한 개념어에서부터 우리의 일상 언어까지 한글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은 조금씩 바꾸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품사'를 '씨'로 바꾸는 것이라든가 '문장'을 '월'로 바꾸는 것은 한글학회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도 하고 한글세대에 맞게 고치는 것이기도 하다. '월'같은 경우는 '文'을 '글월 문'이라고 새기는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남아있다. '피투성被投性의 존재'는 '던져진 존재' 정도로 현재 이미 바뀌어 쓰고 있다. '벤또'나 '와리바시', '요지'등은 점차 '도시락', '(나무)젓가락', '이쑤시개' 등으로 바뀌고 있다.
앞으로도 이런 노력은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 말이 생겨난 근본이 한심스러운 '로비lobby'라는 말을 '안터'라는 말로 고쳐쓰려는 노력은 조금 진행되다가 말았다. '엘리베이터'를 한자어이긴 하지만 '승강기'정도로 바꾸려는 시도도 실패했다. '에스컬레이터'는 '자동계단'정도로 부르면 무난할 듯 싶은데 시도조차 없었던 듯 하다.
물론, '안터'라고 하지 않고 '로비'라는 외래어를 쓴다고 언어가 더 '타락'된 언어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말이 더 아름다워보인다면 그런 장점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언어도 하나의 문화이니만큼 돈 따위에 좌지우지되게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잊고 있지는 않은가, 언어도 하나의 문화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