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적이/2003

영웅전설

엔디 2003. 3. 30. 01:03
- 인류의 평화와 인권을 위한 전쟁이라고 포장한다.
- 길게 늘어선 진형 때문에 보급선이 끊겨 전쟁 지속이 어렵다.
- 독재자 치하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해방을 기뻐하기 보다는 물과 빵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심지어 빵을 먹을 수 있었던 예전이 더 낫다고 하는 사람까지 있다.
- 결국은 민간인들까지 희생하게 되었다.

USA의 이라크 침공 이야기가 아니다. 다나까 요시끼의 소설『銀河英雄傳說』이다. 유치한 제목이긴 하지만 그 나름으로 정치에 대한 고민을 해본 책이다. 박진감넘치는 전쟁씬, 격추왕의 美化 등으로 대중소설의 한계를 드러낸 부분도 없지 않지만, 이 소설이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것은 정치 체제에 대한 고민이다.

주인공 얀웬리(양웬리의 誤記)는 역사를 공부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사관학교 전사戰史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전사학과는 곧 폐과되고 자퇴하려면 지금까지 혜택받은 등록금을 소급해서 내야한다는 말을 들은 얀은 할 수 없이 학교의 권고를 받아들여 전략학과로 옮기게 되고, 군인이 된다. 그가 역사에서 배운 것은 전쟁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명분허구성이다.

소설에서 자유행성동맹 정치인들은 타락한 황제 치하의 은하제국을 어서 해방시키자며 주전론을 펼치고 반전론자들을 탄압한다. 결국 자유행성동맹은 대대적인 군대를 은하제국영토로 진입시킨다. 은하제국은 그곳을 초토화시키고 민간인들을 내버려둔 채 후방으로 후퇴했다.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우리들은 해방군이다."

살아남은 농민과 광부 등 주민들을 향해 동맹군의 선무(宣撫)장교는 먼저 민심의 안정에 주력했다.

"우리들은 그대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약속한다. 이제 전제주의의 압정에서 시달리지 않아도 되며 자유로운 시민으로 새출발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기대했던 열렬한 환호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었다. 무표정하게 귀기울이던 농민 하나가 나서더니 이렇게 말했다.

"정치적 권리나 자유 따위는 앞으로의 문제입니다. 식량을 주십시오. 갓난아이에게 먹일 우유가 필요해요. 저들이 철수할 때 모조리 싣고 떠났어요."

"염려마십쇼. 식량문제는 곧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환영보다 요구를 앞세운 주민들의 반응에 내심 실망하면서도 선무장교는 환한 얼굴로 선뜻 받아넘겼다. 그들 말대로라면 그들은 해방군이었다. 제정(帝政)의 무거운 질곡에 시달려 온 가련한 민중에게 생활보장을 해 주는 것은 전투에 버금가는 중요한 책무였다.

동맹군은 각 함대의 보급부로부터 식량을 받아내면서 이젤론 총사령부에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5,000만 명이 90일간 먹을 수 있는 식량, 200여 종에 가까운 식용 식물의 씨앗, 인조 단백 식물 40, 수경재배 식물 60 및 그것들을 수송해 줄 선박......

"해방지구의 주민들을 기아상태에서 완전히 구제하려면 최소한 그 정도는 가져야 한다. 해방지구의 확대에 따라 이 수치는 더욱 증가될 것이다."

그러한 요구서를 읽고 난 원정군의 후방참모 카젤느 소장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부터 했다. 5,000만 명이 90일 동안 먹을 식량이란, 곡물만으로도 50억 톤이나 되니 1,000만 톤급 수송선이 500척이나 필요했다. 게다가 그 수량은 이젤론의 식량생산이나 저장능력으로선 도저히 따를 수가 없는 엄청난 물량이었다. 카젤느 소장은 다시 한 번 고개를 흔들었다.

"이젤론의 식량을 전부 끌어 모아도 그것은 7억 톤도 안 됩니다. 인조 단백과 수경 식물을 전량 회전시켜도......"

"부족하단 말이겠지?"

부하의 보고를 카젤느는 중도에서 잘랐다. 3,000만 명의 장병을 대상으로 하는 보급 계획은 카젤느 자신이 세웠으므로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수의 2배 가까이나 되는 비전투원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하루 빨리 계획의 규모를 3배로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각 함대의 보급부가 탄식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렇더라도 선무장교란 녀석들은 모두 저능아들이란 말인가?'

그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요구서의 말미를 되읽고 나서였다. '해방지구 확대...... 이 수치는 점차 증대......'라 함은 보급 부담이 증대한다는 뜻이 아닌가.

은하제국 치하에 있던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두손들고 반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빵을 원하고 있었다. 자유행성동맹 정치인들의 오판이었다.

얀은 전쟁의 명분은 늘 전쟁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물론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지만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국민들을 쥐어짜 전쟁을 치른다는 자체가 민주주의의 붕괴라고 생각했다. 그가 군인이면서 전쟁을 반대하는 아이러니는 여기서 발생했다.

부패한 민주정치와 청렴한 독재정치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는 인류 사회에 있어서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명제일 것이다. 은하제국의 국민들은 그런 점에서 행복할는지도 모른다. 부패한 전제정치, 즉 논의의 여지가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서서히 구출되고 있었으니까.

그의 정치 체제에 대한 고민도 마찬가지다. 부패한 민주제와 공명한 독재정치 중 어느 것이 나은가 하는 문제는 소설 내에서도 여러번 직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얀의 결론은 늘 그래도 민주제가 낫다는 것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부패한 민주제가 지긋지긋하기도 할 것이다.

모순이 지나쳐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얀이 동맹군에 속하여 전장에 나섰던 것은 황제의 전제정치보다는 비록 시행착오가 반복된다 하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운영하는 민주주의 쪽이 보다 소망스럽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본고장이라는 행성 하이네센에 있으면서 얀은 썩는 냄새를 내뿜는 중세적 권력자들의 새장에 갇혀 있지 않은가.

소설은 부패한 은하제국의 골덴바움 왕조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황제에 오른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공명한 독재정이 은하를 통일하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에서 은하제국의 법령에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노력도 나타나는 등 나름대로 희망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은하영웅'은 누구일까? 얀일까? 그의 양자 율리안일까? 아니면 은하를 통일한 라인하르트일까? 그들 중 누구도 영웅은 아닐 것이다. '은하영웅전설'이라는 제목은 얼마간 아이러니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영웅이라고 인식하는 정신병자가 세계를 혼란으로 이끌고 있는 것 같다. 영웅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전쟁의 명분은 전쟁을 위해 만들어지고 조작된 것이었지만 이번 전쟁은 그런 명분조차 뚜렷하지 않다.

제목부터 유치한 소설 '은하영웅전설'을 무시하고 내리보려거든 먼저 자신 안에 '영웅'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이 있지는 않은지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굳이 영웅을 만들고 싶거든 '청소부 김씨'가 영웅으로써는 적격이다. 故 이문구 선생의『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를 본다면 왜 그들(만)이 영웅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