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적이/2003

안면도 여행 2.4-2.6

엔디 2003. 2. 10. 00:32
여행이라고 하기엔 조금 무엇한 점이 있지만 그래도 여행이라고 부르겠다. '시학여행'은 처음 소영이네 고모부 댁으로 다녀온 이후 나를 떨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 부여로 정해졌지만 유경씨 외가가 부여인 관계로 유경씨가 새로 안면도로 장소를 정해왔다. 남부터미널에서 세시간 이상이 걸려서야 안면도에 도착했다. 예약했던 민박집에 도달해 여장을 풀고 쉬다가 늦게 도착한 나현씨를 맞아 삼겹살부터 구웠다. 나현씨는 한 점도 먹지 않았다. 채식 중이라고.

이번 여행은 정말 방에만 처박혀 있었던 여행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MT라고밖에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바다에 나간 적이 있지만 바닷바람이 워낙 거세서 사진만 몇 장 찍고 돌아왔다. 한두시간이나 있었을까? 그래도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 시간들이라고 해야겠다.

지난번 동해 여행때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개 한 마리가 우리를 계속 쫓아왔다. 오다가다 개와 장난치는 순간은 늘 재미있다. 개가 떨어지지 않으면 귀찮지만.



안면도 큰새우(대하)집과 횟집들은 즐비하게 서서 우리를 유혹했지만 우리는 본의 아니게 그 유혹들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돈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몇 대의 카메라로 안면도의 바다를 찍어댔다. 나는 풍차부터 찍었다.



바람개비같기도 한 풍차는 쉴새없이 돌아가는 듯 싶다가도 금새 멈추고 멈추었다가도 곧 다시 돌아가곤 했다. 바람이 쉬질 않는다는 뜻이다. 쉬지 않는다, 쉬지 않고 일하여 바람을 일으킨다,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여섯 명이 여행을 갔는데 카메라가 여섯대라니, 사진 찍으려고 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우리가 사진이나 남기려고 여행을 간 것은 아니다. 여행의 목적은 여행 그 자체이다. 추억을 위해 여행을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語不成說이다. 추억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행이든 뭐든 의도하지 않은 것을 따라서. 설령 추억을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여행을 갖더라도 그 추억은 기대했던 추억과는 거리가 클 것이다.

섬 같은 두 큰 바위가 뻘에 있었다. 우리가 나간 시간은 정오를 지나 저녁이 되기 전이었는데 밀물때였나보다. 바위 섬인지 바위 산인지 모를 두 돌덩이 가까이에는 조개껍질과 굴껍질이 많았다. 뻘에서 우리는 기러기를 좇으며 놀았다. 푹신한 진흙 촉감이 좋았다. 바위섬에 오르려는 생각은 무모하다고 결론이 났다.



여기서 카메라 배터리가 다 되었다. 다 닳을 줄 알고 배터리를 가져오긴 했지만, 아뿔사 다른 배터리는 우리 방에 있는 걸. 찍고 싶은 무늬들이 해변 곳곳에 장식되어 있었지만 나는 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이것 말고도 다섯 대나 있으니 해변의 아름다움의 그림자들은 볼 수 있겠지. 그림자가 아니면 담을 수 없으니 말이야.



그래도 참을 수 없었다. 카메라를 끄고 얼마 뒤 혹시나 하고 켜보았더니 배터리 잔량이 모인 것인지 작동이 되는 것이었다. 이 때다 하고 바닷물이 밀려오는 시각에 재빨리 뻘 바닥을 찍었다. 이 무늬가 누구의 마음인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인성의 소설이 생각났다.

오는 길에 설익은 군밤을 사먹었다. 겉만 익고 속은 딱딱했다. 내가 군밤같구나. 앉아서 철망을 찍었다. 저쪽엔 바다가 있었다. 바닷물이 점점 밀려올 것이다. 우리가 걸었던 곳은 곧 바다가 될 것이다. 바다는 언제 오는걸까.



돌아와서는 다른 일행들 몰래 셋이서 남은 삼겹살을 구워먹었다. 내가 사간 머루주는 달지 않았지만 입을 편하게 해주었다. 술이 없다면 우리의 여행, 아니 우리의 삶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새삼 술이 가진 덕을 생각해본다. 예수의 첫번째 이적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것이었던가.

학생들끼리의 여행이 늘 그렇듯 늦잠에 늦잠이 이어져 하루는 짧았고 2박 3일은 더 짧았다. 몇 잔을 마시고 나니 돌아올 시각이었다. 라면을 먹고 터미널로, 그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내가 거기 무엇을 두고 왔을까. 아니, 아무 것도 두지 말고 온 것이면 좋겠다. 이번 여행이 즐겁진 않았지만 그래도 '시학여행'이라는 이름이 주는 느낌이 있다. 여행은 때로 이름이 모든 것이기도 한 것 같다.

가고 싶던 여행이었고 잘 다녀온 여행이었다. 고맙다, 누구에게인가.